성경보다 크신 하나님
경상북도 예천. ‘군’과 ‘읍’이라고 명시되는 작은 동네에서 나는 태어났고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살았다. 내 부모님은 지금도 여전히 예천에 계신다. 지금은 아니지만 내가 중학교 생활에 적응했을 무렵에 우리 집은 연탄보일러를 사용했다. 달력은 점점 얇아지고 그로 인해 기분이 울적해지는 이맘때쯤이면, 아버지는 연탄 차를 불러 마당 구석에 겨울을 나기 충분한 양의 연탄을 쌓아 두셨다. 파란 트럭에 가득 실린 연탄을, 땀을 뻘뻘 흘리며 옮기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생이 된 후 아버지는 나에게 밤에 연탄 가는 일을 맡겼다. 연탄은 아침에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점심과 오후 사이에 한 번 총 세 번 간다. 우리 부모님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상당히 일찍 잠자리에 드셨던 거로 기억한다. 그래서 자기 전에 연탄 가는 일은 고등학생이 된 내 몫이 되었다. 처음에는 한밤중에 마당에 나가 연탄을 가는 일이 무서웠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라 제집에서 자고 있던 멍멍이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연탄을 갈았다. 그러다 자정에 점점 익숙해지고 어둠에 대해 여유가 생기자, 밤하늘 정도는 올려다볼 수 있었다. 시골에서 보는 밤하늘은 정말 아름답다. 짙은 남색과 연한 검은색, 보라색이 뒤섞인 하늘에는 새하얀 별들이 총총히 박혀 반짝거린다. 운이 좋으면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똥별도 볼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별자리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제법 별자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시린 손으로 연탄을 갈고 난 뒤 바라본 밤하늘에 반짝이던 오리온자리를 나는 아직 기억한다. 그러나 사실 내가 본 밤하늘은 하늘이 아니다. 우주다. 낮에는 태양과 가시광선(맞나?)으로 인해 푸르게만 보이던 하늘은 태양이 반대쪽으로 물러가고 그 빛이 사그라지면, 붉은빛으로 물들었던 하늘색을 거두고 우주를 보여준다. 나는 당시 내가 보고 있던 밤하늘이 사실 우주라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우주가 우주의 전부가 아님 역시 알았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요즘 학교와 교계가 성경 해석 문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동성애(성 소수자) 문제로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 소수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근거로 그들을 거부한다. 성경에 동성애는 죄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은 죄인이며 그들을 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물론 이상한 변명을 하긴 한다. 동성애는 미워하되 동성애자는 사랑한다나? 뭐, 어쨌든.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성경이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하나님을 온전히 나타내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지만 성경을 기록한 기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을 쓴 기자는 사람이기에 성경에는 오탈자도 있고, 부정확한 기술도 존재한다. 또한 당시 그가 살아가던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 속에 갇혀 살아가며, 그 당시 인식 속에서 성경을 기록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당시 사람들의 수준에 맞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기록된 당시 상황을 파악하고 오늘날에 맞게 본문을 재해석해야 한다. 문자 그대로 바라보고 그 자체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고대 성경 기자의 상황 속에 갇힌 텍스트를, 오늘날 살아 역사하는 말씀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성 소수자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성경이 동성애를 죄라고 말한다고 해서(내가 보기엔 그것도 잘못 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성경 기자가 살던 당시의 시대적, 지식적 한계를 인정하고 오늘에 맞게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정말 하시려는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
만일 성경 그 자체를 너무 신봉해, 성경에 오류가 없다고 믿으며,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가 될 뿐이다. 열왕기하에는 히스기야 왕이 모세가 만든 놋뱀을 파괴하는 장면이 나온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모세가 만든 놋뱀이 히스기야 왕 시대까지 남아 우상으로 변한 것이다. 성경도 이와 같이 변질될 수 있다. 나는 성경의 권위를 존중한다. 그러나 성경 그 자체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했던 말씀을 그 당시 사람들의 수준에 맞춰 계시하신 책일 뿐, 무오 하거나 완벽한 책은 아니다. 하나님을 성경의 문자 속에 가두지 말라. 하나님은 성경을 넘어서시는 분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밤이다. 창밖으로 우주가 보인다. 우리가 보는 밤하늘이 우주의 전체라고 생각하진 말라. 우주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여기지 말라. 성경 너머의 하나님을 바라보자. 우리가 성경 너머의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 사랑에 맞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나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이 죄인이거나 원수라 할지라도.